Sep 7, 2013

퀴즈쇼


조금 더 젊을 때는 (지금도 젊지만) 주말이면, 꼭 주말이 아니라도 틈만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밖을 쏘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주말이면 꼭 하루쯤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주중에 많은 사람들을 서로의 이해관계에 엮여 만나다 보면, 그 건조한 공기 속에 지치는 것이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다른 이유는 프로젝트마다 계절이 바뀌는 컨설턴트가 되면서 이렇게 한주한주 곱씹지 않으면 나의 한달이 나의 한해가 서먹서먹 오는 듯 떠나 버릴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이번주는 여자친구와 함께 북카페에 갔다. 점심 먹고 들어간 북카페에서 재미 있는 책을 잡고 완독한 뒤 저녁식사를 하러 나왔다. 점심과 저녁 사이의 그 감쪽 같은 시간을 높은 밀도로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한권의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구절을 집에 돌아와 자기전 블로그에 메모해 두는 것은 요즘 발견한 아주 기품 있고, 지적이며, 여유롭고, 된장 스러우며 또한 좀 찌질한 아주 나에게 꼭 맞는 취미이다.



오늘의 책은 퀴즈쇼.



"자네도 요즘 젊은이 같구만. 생각도 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고 있잖아."
"그게 어때서요?"
"우선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거든. 그리고 틀리더라도 일단 자기 답을 준비해둬야 하는 거야."
"왜요?"
그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세상이 그런 젊은이를 좋아하니까. 세상은 질문하는 젊은이를 좋아하지 않아. 자기 대답을 갖고 있는 젊은이를 원하지."
"질문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는데요."
"그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게."

-김영하. 퀴즈쇼. 47쪽-



나는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바람이 차가웠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상쾌하게 느껴졋다. 그 상쾌함은 조금 독특한 것이었다. 포커에서 가진 돈을 다 잃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랄까. 바로 조금 전까지 상대방의 패를 읽기 위해 들였던 노력에서 해방됬다는 기쁨. 이제 그 치열한 머리싸움이나 표정관리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에서 오는 자포자기의 쾌감. 그건 아마도 자기 존재의 바닥을 확인한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좋아. 드디어 밑바닥에 다다랐군.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셈이야. 겨우 이정도였나? 별거 아니었잖아? 나는 내 감정이 시키는 대로 나쁜 습관과 충동에 모든 것을 내맡겼고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자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꼴이 됐다. 그러나 아직 멀쩡하지 않은가?

-김영하. 퀴즈쇼. 118쪽-



"나는 사람이 두 종류라고 생각해. 자기만의 벽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게 얇아.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절대로 믿지 않아. 현실만이 그들의 신앙이고 종교야. 한번 판단이 내려지면 그들은 가차없고 냉혹해. 물론 그런 사람들이 편할 때도 있지. 자기보다 강하고 부유한 사람에게 약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친교를 쌓는 건 너무 지루하고 피곤한 일이야.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라든가. 그게 도대체 나한테 무슨 득이 되나. 같은 질문만 던지는 사람들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너 같은 사람이야. 너는 조용한 걸 좋아하잖아. 지식, 퀴즈, 소설 같은 것들 말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우리 아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빠가 언젠가 한 말은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아빠가 그러는 거야. 나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까 계산 빠르고 실속 잘챙기던 인간들은 다 별볼일 없는 놈들이 돼 있고 철없는 몽상가들이 큰 인물이 돼 있더라는 거야. 머리 좋은 사람들은 남의 밑에서 굽실거리거나 감옥에 갔고 대신 꿈이 컸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더래."

-김영하. 퀴즈쇼.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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